🌞 우울한 게 아니라 화난 거였다고?

2024. 4. 5.

우울한 게 아니라 화난 거였다고?

감정은 단순하고 솔직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꽤나 복잡합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잘 인지하지 못할 뿐더러, 내가 왜 지금 슬픈지, 왜 화가나는지 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낯선 사람과의 교류가 많은 사회에서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 지기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도 모르는 내 감정, 그 수수께끼 같은 세계로 떠나볼까요?

우리는 긍정적 감정과 부정적 감정 중 무엇을 더 많이 느끼고 있을까?

며칠 전에 내담자의 감정을 더 잘 읽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감정 카드를 샀습니다. 50가지 종류의 감정 단어와 그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 들어 있는 카드였어요. 감정의 종류에 따라 파란색은 슬픔, 빨간색은 분노, 보라색은 불쾌함, 초록색은 두려움, 그리고 노란색은 기쁨에 관한 감정을 나타냈습니다. 카드를 나열하다 보니 문뜩 5가지 종류 중에서 긍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카드는 노란색 한 종류 뿐이라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긍정의 감정을 표기한 노란색 카드는 17가지로 그 수가 가장 많았지만, 그 밖의 나머지 부정적인 감정들을 모두 합치면 33가지로 긍정적 감정보다 그 숫자가 2배 가량이나 더 많더군요.

역시 인생은 고통인가? '삶은 고(苦-괴로울 고)다'는 붓다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고통을 더 많이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연구 결과들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일상에서 부정적 감정을 항상 더 많이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매일매일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는 실험 논문에서 참가자들은 긍정적 감정을 부정적 감정보다 2.5배나 더 많이 보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순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특정 현상이나 사물을 묘사하는 단어가 많은 것은 그 현상이나 사물이 그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나타내곤 합니다. 북극 사람들이 쓰는 이누이트(Inuit) 언어와 사미(Sami) 언어에서는 눈이나 얼음을 지칭하는 단어가 최소 180가지가 있다고 하죠. 사막에서 살아가는 아랍 사람들에게는 모래의 질감이나 사막의 상태 (건조한, 습한, 바람이 많은)를 묘사하는 단어가 많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바다가 생활의 중심인 하와이에서는 파도의 크기와 형태, 바다의 상태 등 바다를 묘사하는 단어가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부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부정적 감정이 우리 일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단어의 종류가 많다고 해서 우리가 부정적 감정을 더 많이 더 자주 느끼면서 산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부정적인 감정은 짧아도 강렬하게 기억에 남기 때문에 더 강하게 인식이 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부정적 감정의 역할은 잠재적인 위험을 알려주는 것이기에 눟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신호 역할을 하니까요.*

감정을 너무 적게 느껴도 문제가 된다고?

부정적 감정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그것은 때로 매우 고통스럽죠. 부정적 감정을 크게 느끼게 되면 일상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마음이 요동쳐서 지금 직면한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래서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거나, 시험을 망치고, 중요한 순간에 감정적인 말을 쏟아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금이 가기도 합니다. 너무 화가 나서 일이 손에 안 잡히거나, 너무 불안해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 경험, 슬퍼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약속을 취소해 본 경험은 다들 한 번쯤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정서 과잉으로 인한 문제는 다들 익히 경험해 보아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부정적 정서가 보내는 신호에 압도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최대한 감정을 컨트롤 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역으로 정서를 너무 적게 느끼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대해 순간적으로 감정을 느끼지만, 그것이 내게 도움이 되는지, 이 상황에 적절한 것인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한 뒤에야 그 감정을 허락하곤 합니다. 감정은 그 뒤에 이어질 행동을 예측하는 단서이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그에 이어질 행동)이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감정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 의도는 상황을 보다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잘 대응하기 위해서 조절하려는 노력이었지만, 이성적인 판단과 해석이 과도해지면 애초에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아서 더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감정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노를 느끼는 것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고, 우울함을 느끼는 것에 대해 나약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분노가 어째서 무력감으로 연결되느냐고요? 예를 들어, 일을 나에게 다 떠넘겨 놓고 본인은 커피를 마시러 나가서 3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들어오는 팀원을 보면 화가 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말마다 족족 딴지를 거는 동료와 같이 일할 때면 나도 모르게 분노가 솟구칩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화가 나도 화를 낼 수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키는 데로 화를 내면 꼰대가 되거나 피해야 할 선배가 될 수 있고, 딴지 거는 동료에게 화를 내고 싶어도 그가 지적한 말 중에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때도 있으니까요.

이렇게 화가 나도 내가 느끼는 데로 마음껏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힘이 없고 요령도 없어서 당하고만 있는 자신이 너무 무력하고 보잘것없게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면 화가 나는 것 보다도 그것을 참고 있는 상황때문에 더 기분이 안좋아 집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화가 나는 것 자체보다도 우울함이 더 압도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진짜 문제와는 관계없는 우울함을 지배적으로 느끼게 되면서 해석이 꼬여 버리는 것이죠. 전문가들은 이것을 2차 감정이라고 합니다.

2차 감정으로 인한 문제

부정확한 감정인식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

2차 감정은 상황에 대한 해석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정서는 그저 느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서중심치료의 대가인 Greenberg 박사는 “정서는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주고, 그 상황에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일이 제대로 진행되게 해 준다. 특히, 정서는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다양한 환경에 적응적으로 반응하게끔 한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상황에서 어떤 정서가 느껴지는지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2차 감정은 상황 인식을 모호하게 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정서는 이성과 함께 작용하여 분명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들도록 돕는다는 학자들은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2차 정서로 인한 혼란은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게’ 하여 ‘덜 똑똑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분명 합니다.

과잉 긍정 문화도 정서 파악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가 정서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로 긍정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합니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접하는 광고 속에는 긍정적인 감정이 넘쳐납니다. 소셜 미디어는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콘텐츠를 더욱 많이 노출해 주고* 있다고 합니다. 뭐든 가능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과잉 긍정의 사회*에서는 좌절하고 슬퍼하는 사람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슬픔이나 좌절 같은 감정을 충분히 받아들이는 데에 서툴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면을 찾아봐”,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었어”라며 서둘러 좌절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말을 던지곤 합니다.*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경우도 있고, 부정적 감정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 옆에 있는 사람이 해줄 수 있는 도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부정적 감정으로 괴로워할 때 그와 대척점에 있는 긍정적 감정으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은 좋은 치료법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선 일차적 감정을 정확히 인지하고 그것에 충분히 머무르고 난 뒤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섣부른 긍정은 마치 팔이 부러졌는데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좋은 면을 생각해 봐”라고 하는 것과 같은 공감력 결여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감정은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 자체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다만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그에 따른 행동을 모두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감정에 따른 행위를 하지 않기로 선택하면서도 그 감정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당장 화를 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화가 나는 감정이 버려져야 할, 아무 쓸모 없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죠. 감정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일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표출해야만 해소가 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혼자만 아는 선에서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소가 되기도 합니다. 일기장에 쓰거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은 자신의 감정에 얼마나 솔직한가요?

최근 여러분이 느낀 불편한 감정이 있었다면 어떤 감정이었는지 한번 떠올려 보세요.
혹시 상황에 적절하지 않은 감정을 느꼈다면 그 감정을 둘러싼 사건을 분석해 봅시다.
어떤 일이 있었고, 나는 무엇을 느꼈나요? 그래서 나는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 하였나요? 외면했나요? 아니면 다른 감정으로 덧씌우려고 했나요?
적절하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나요?
진짜 감정이 내게 주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내가 느낀 결핍을 채우기 위한 장기적 계획을 세워보고 나누어 주세요.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계신가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

출처:

Debra Trampe et al,.(2015). “Emotions in Everyday Life", PLOS ONE,Dec 23, 2015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01/2013060100729.html
Aaron Ben-Zeév Ph.D. "Are Negative Emotions More Important than Positive Emotions?", Psychology Today, Jul 18, 2010
Tiffany Sauber Millacci, "Toxic Positivity in Psychology: Examples & Research Findings", Positive Psychology.com, Apr 13, 2021
Leslie S. Greenberg. (2023). 정서중심치료 내담자가 자신의 감정을 다루도록 코칭하기. (윤명희, 역). 학지사.
Leslie S. Greenberg. (2023). 정서중심치료 원서 2판, (한기백, 역). 학지사
한병철. (2012). 피로사회. 문학과 지성사.
Storm, Christine & Storm, Tom. (1987), A Taxonomic Study of the Vocabulary of Emotion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Vol. 53, No.4 805-816